[한국 현대영미드라마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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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김정호  2007-02-16 10:42:11, 조회 : 1,881

아침에 출근하면서 듣는 FM 방송은 음악도 음악이거니와 좋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친구입니다.
년 초, 다소 늦게 게으름을 피우다 끝무렵의 방송을 듣던 중
뜻밖에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소개합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면서, 이웃을 마음으로 깊이 배려할 줄 알고,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의 공존을 위한 삶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책,
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가 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원어로는 어린 나무 가르치기(The Education of Little Tree)라는 책입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체로키족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작은나무'
(그들의 이름은 대개 서술형이어서 듣는 순간 우리는 이미지를 떠 올릴 수 있죠.
"주먹쥐고 일어서" "늑대와 함께 춤을" 또는 "절벽 위의 바람맞이" 등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들 말입니다.)
의 시선으로 본 삶의 모습을 그려낸 이야깁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산길을 끝도 없이 걷다가 작은나무가 지친 모습을 보이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죠.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것이 좋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멈추는 법 없이 걷는 속도를 늦추는 것으로 할아버지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결코 겉으로 드러내는 법 없이, 절제 속에서 행해지는 할아버지의 이런 사랑은
소년이 숲속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계속됩니다.

나를 가장 감동하게 했던 대목은 바로 다음입니다.

사냥을 나선 날, 할아버지는 작은나무에게 세상 사는 이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하고, 사슴을 잡을 때도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져서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인디언인 줄 알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버스 운전사에 대해서는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짐이지,
우리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인해, 부모를 여읜 슬픔에 쌓인 작은나무는
스스로 그 슬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꾸려 나갑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죽음, 쓸쓸하고 힘든 고아원 생활,
또 다른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작은나무의 영혼은 이렇게 아름답게 그리고 강하게 성장합니다.
그 영혼의 힘은 바로 인디언들의 삶의 자세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미국인원주민(Native American),
그러니까 인디언이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린 사랍들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흑인문학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특정 문화는 그 문화의 상징화 작업에 저항하는 대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죠.
그 좋은 예를 바로 미국식 인종차별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백인이주민들과
인디언이라고 불렸던 미국 원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북미대륙으로 이주해 간 백인들은 미국원주민들을 철저히 파괴했는데
그들이 왜 그렇게 미국 원주민들을 파괴했는지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계몽주의 이전 시대 사람들이었던 백인이주민들은 소위 "성스런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회는 엄격한 율법으로 무장된 종교가 사회적 상징 체계의 핵심이자 지배 요소였던 사회였구요.
또한 꾸중과 처벌을 밥먹듯이 하는 "성난 신"을 모시고 살던 사회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미국원주민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양태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의미 체계 영역을 벗어난 이방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미국원주민들은 성스러운 세계 밖의 존재들이며,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세속적 혹은 악마의 영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며,
자신들의 성스런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할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늑대하고 춤이나 추어대고 물 새 우는 언덕 위에서 바람이나 친구 삼아 시시덕대는
참으로 짐승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백인이주민들은 수틀리면 같은 백인들도 마녀로 몰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다니엘 호오손의 <주홍글자>에 잘 나타나 있듯이 말입니다.
게다가 정든 고향에서 쫓겨 나 물 건너 고생 고생하면서 정착하게 된 객지가
낯설기도 했을 것이고, 심정 또한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상하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그야 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이었고
"여기까지 와서 저 꼴을 봐?"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포카 혼타스 같은 여성의 도움을 받았어도 그건 모두 지네가 잘난 탓이었지
원주민의 너그러움 덕이 아니었구요.

미국원주민들의 문화를 뭉뚱그릴 수 있는 특징이라면
바로 공동체적 결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했으며 개인적 소유의 개념이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평등의 개념에는 자연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성스럽게 여기고 더불어 살고 있었죠.
이름도 "늑대하고 춤을 춰"나 "절벽 사이로 부는 바람" 이었으니
가히 짐작할 만 하지 않습니까?.

미국원주민들의 이러한 문화는 유럽 사회를 받쳐주고 있던
기독교의 계명과 어긋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반드시 제거해야할 문화였습니다.
즉 원주민들의 공동체성은 그들의 국가 중심주의와 어긋났으며,
평등주의는 사회적 위계질서에, 그리고 자연과의 성스러운 연대감은
생산수단으로서의 자연관과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백인이주민들은 미국원주민들의 이러한 차이에 대해 이름을 붙여야 했으며,
자연히 미국원주민들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인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미국원주민들에게 들씌운 "야만인" 호칭은 그들과 다르다는 의미에 불과하고,
이름 붙이기라는 행위는 전혀 이념 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문화의 가치 판단과 이념 체계가 덧씌워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종차별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유형화죠.
그러니까 개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종이라는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차이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화 작업에 의해 백인들에게 미국원주민들은 그저 한 무리의 야만인들이었습니다.

또한 대중매체의 힘을 이용해 이 유형화된 심상들은 복제되어 산포됨으로써
일반화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미국 영화 속 이상한 인디언들이나 건들거리는 흑인들이 그렇습니다.

흑인들도 백인들이 쳐 놓은 덫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원래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도 잡도리 한 백인들에게
일 시켜먹으려고 돈주고 사 온 흑인들이야말로 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백인틀 틈에서 작은 나무가 그 자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키워나갔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언제였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특별한 이해 관계 없이 좋아했고
덩달아 나도 사랑했던 그 날들은 아마 젊은 시절, 한 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귀한지도 모릅니다.
다 날아가버리고 어디에도 없는 시절.
지나보내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시절은 아마 대학생활? 아니면 고등학교 시절?

오늘 아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출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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